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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컴: 딜리버런스

중세나 현세나 엄마의 잔소리는 변함이 없다.
주인공치고는 평범하고 후줄근한 외모.
철저한 고증을 통해 구현된 15세기 초 평민의 집 인테리어
마을 모습

 

액션 롤플레잉의 탈을 쓴 본격 중세 체험 시뮬레이션 게임 킹덤 컴: 딜리버런스(이하 킹덤컴)를 90여 시간만에 마쳤다.

일반적으로 '중세'를 소재로 한 게임들은 실제 중세시대보다는 중세를 모티브로 가상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각종 마법과 몬스터들이 가미된 '판타지'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킹덤컴은 마법이나 몬스터는 단 1도 등장하지 않는 리얼 중세를 표방하며, 게임의 무대 역시 실제 보헤미아 왕국(현재 체코)이고 등장인물의 상당수가 실존 인물일 정도로 현실적인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15세기 초 중세의 생활양식부터 문화, 사회, 정치양상, 주요 직업군 등의 방대한 정보를 게임 내 사전 형태로 제공하며, 의상과 갑옷, 건축물들의 구조 하나하나까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구현해 놓았다.

그렇지만 이런 치밀한 중세 재현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데, 마법도 몬스터도 없고, 멋진 무기도 화려한 갑옷도 없는 현실적인 게임보다는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게임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킹덤컴이 목표로 한 리얼한 중세시대 오픈 월드 롤플레잉 게임은 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투자 및 배급사를 찾기 어려워 개발에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나의 경우 중세 판타지도 물론 좋아하지만 킹덤컴 같은 현실적인 중세물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오랜만에 완전히 몰입해서 즐길 수 있었다.

 

꽤 정교하게 구현한 중세 오픈 월드

 

게임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그래픽은 2018년 작 치고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데, 요즘엔 아무도 안 쓰는 구형 엔진인 크라이엔진 3로 제작되었다.

그래도 한때는 잠시나마 언리얼 엔진을 그래픽 퀄리티로 압도했던 엔진이고, 특히 초목을 비롯한 자연경관 표현에 강점을 지닌 엔진인지라 몇 안 되는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이 숲과 들판인 중세시대 오픈 월드를 꽤 그럴듯하게 뽑아냈다.

건축물의 경우 고증에 충실한 디테일이 상당한데, 물레방아나 풍차를 그냥 겉모습만 구현한 게 아니라 내부로 들어가면 톱니바퀴 하나하나 실제와 똑같이 작동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인물 그래픽도 봐줄 만하고 디테일도 괜찮지만 예산의 한계 때문인지 주요 인물들을 제외한 NPC들의 얼굴이 그놈이 그놈이고 특히 여성 캐릭터들은 3~4명 가지고 돌려썼는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다채로움이나 개성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 아쉽다.(헤어스타일도 몇 가지 안된다)

그리고 캐릭터 모션 역시 제작비가 문제였겠지만 요즘 게임들이 워낙 모션 캡처에 투자를 많이 하다 보니 눈높이가 높아져서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해 보인다.

캐릭터 애니메이션/모션은 악명 높은 베데스다의 게임들에 비해 약간 나은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찐따같아 보였는데 여자 친구도 있는 능력자였다.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주인공
중세시대 까지 가서 공부를 해야 하다니..
당시 귀족들의 성격이나 중요시하는 가치관 등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있다.
당시 사람들의 의상 역시 고증을 거쳤다고 한다.
전투 후에는 검에 피가 묻고 수리를 하거나 이렇게 숫돌로 갈아야 없어진다.
성직자들에 대한 묘사도 디테일하게 담고 있는데, 게임을 진행하며 직접 수도사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데 AAA급 사이즈의 게임이 아님에도 적지 않은 분량의 대사를 풀 더빙하고 중세시대로 돌아간 듯한 배경음악까지 더해져 몰입감을 높여준다.

게임의 기본적인 스탯/스킬 시스템은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이하 스카이림)과 유사한데, 사용 기반의 경험치 획득과 그로 인한 레벨업, 레벨 업으로 인한 퍽 획득의 구조로 되어있다.

당연히 무기별로 전투 스킬이 존재하고 보수(수리), 연금술, 승마술, 화술, 소매치기, 자물쇠 따기, 음주와 독서 등 수많은 비전투 스킬 역시 존재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독서 스킬인데, 주인공 신분이 대장장이의 아들이라 문맹이기 때문에 처음엔 책을 얻어도 읽지를 못한다.

퀘스트를 통해 읽는 방법을 배워야만 게임 내 책을 읽을 수 있고, 이후 독서 스킬을 올리면서 여러 가지 능력을 얻게 되는데 상당히 현실적으로 만들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연금술도 다른 게임들처럼 필요한 재료 인벤토리에 모아서 제작 버튼 누르면 끝나는 게 아니라 레시피 보고 베이스가 물인지 오일인지 와인인지부터 시작해서 약초 넣는 순서와 모래시계로 가열시간 조절, 재료를 갈아서 넣어야 하는지 그냥 넣어야 하는지, 제조 후 증류가 필요한지 등 모든 과정을 아주 디테일하게 구현해놓았다.

능력치와 인벤토리. 특이하게 같은 부위에 옷이나 방어구를 최대 4개까지 장착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옷을 한겹만 입는게 아니라 천옷부터 철로 된 갑옷까지 여러겹 껴입을 수 있는 것 처럼 겹쳐서 입을 수 있고 방어력도 누적되어 적용된다. 
게임의 배경인 15세기 초 중세 유럽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백과사전에서 볼 수 있다.
중세시대 분위기를 살린 일러스트 스타일의 지도
독서를 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물쇠 따는 중

 

게임 진행의 자유도가 높아서 퀘스트 중 어떤 물건을 얻어야 한다면 화술을 이용해 대화로 얻어낼 수도 있고, 무력으로 빼앗을 수도 있으며, 몰래 훔칠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내 선택에 따라 메인 스토리의 큰 줄기가 바뀌지는 않으며, 메인 퀘스트를 중심으로 엮여나가는 서브 퀘스트들의 배치나 무의미한 심부름 같은 게 아닌 충실한 스토리를 서브 퀘스트에 담아내는 등 위쳐 3의 퀘스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퀘스트 선택에 따른 디테일한 분기 처리는 위쳐 3 수준에 못 미친다)

또한 이발이나 면도로 캐릭터의 헤어나 수염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위쳐 3를 떠오르게 한다.

원기와 허기 수치가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잠을 자야하고 배고프면 음식도 먹어야 한다. 귀찮지만 현실적인 요소.
그래도 마을 곳곳에 무료로 퍼먹을 수 있는 꿀꿀이죽(?)이 있어서 음식 챙겨 먹기가 그렇게 까다롭진 않다.
목욕탕에서 이발과 면도가 가능하다.

 

중요한 전투 역시 매우 현실적이어서 혼자 수십 명씩 때려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장비 갖춘 경비병은커녕 허접한 도적 3~4명한테만 둘러 쌓여도 순식간에 죽어나가기 일쑤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는데, 킹덤컴은 세이브도 현실적이라 여관 등 숙박이 가능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야만 저장이 되고 필드에서 저장하기 위해서는 특정 아이템이 필요하다.

즉, 아무 때나 쉽게 세이브할 수 없기 때문에 세이브 못한 채로 진행하다 도적들 만나서 허무하게 죽고, 한두 시간 전 세이브를 다시 불러내야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참고로 킹덤컴은 난이도 옵션이 없다)

중후반부로 가면서 캐릭터가 점점 강해지고 전투에도 자신감이 붙고 세이브 물약에도 여유가 생기면서 사정이 좀 나아지긴 하지만 이런 세이브의 제약은 난이도 상승과 더불어 불편한 요소로 여겨지기 쉽다. 

전투 시스템은 마운트 앤 블레이드와 같은 방향 기반 공격과 막기에 회피, 카운터, 콤보 등 몇 가지 요소를 추가한 느낌인데, 현실적이긴 하지만 타격감이나 전투 모션이 썩 좋지는 않다.

무기 종류는 롱소드(베기), 숏소드(찌르기), 메이스 등 둔기류(타격), 도끼류와 활로 기본적인 것만 다루고 있어서 좀 단조로운 편이다.

원래는 폴암류도 포함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밸런스나 제작 기간 문제로 제외되었다고 하니 아쉬운 부분이다.

처음엔 나도 허접이기 때문에 이런 잡졸로 보이는 놈도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풀 헬름을 쓰면 이런식으로 시야가 가려진다. 답답하다고 헬멧써도 시야 가리지 않게 해주는 모드도 나와 있지만 난 이런 시야의 제약도 현실적인 느낌이어서 좋았다.
도적이 주인공보다 장비가 더 좋아보인다.
전투에 좀 익숙해지면 이정도 까지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스토리 스포일러 일부 포함됨*

마지막으로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고 몰입감이 좋았다.

아마 스토리는 별 볼 일 없고 현실적인 중세시대 구현과 전투, 높은 자유도가 전부였다면 이렇게 재미있게 장시간 플레이하진 못했을 거다.

사실 전체적인 스토리는 치밀한 전개나 놀라운 반전, 방대한 스케일 등 과는 거리가 멀다.

게임의 무대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헤미아 왕국 변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게임 내 가장 큰 전투라고 해봐야 100명도 안 되는 '전투'라기보다는 '싸움'에 가까운 규모다.

주인공 역시 중세물의 단골 클리셰인 '대장장이의 아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귀족의 숨겨진 사생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

주인공의 목적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으로 매우 심플하다.

하지만 이 대단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의 묘사나 연출이 뛰어나서 상당히 몰입하게 만든다.

또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이 뛰어나고 특히 대사가 딱딱하지 않고 재치 있어서 좋았다.(유일하게 고증하지 않은 부분이다. 한글화팀에게 감사를..)

중간중간 컷신을 활용해 스토리 연출의 효과를 잘 살린 것도 좋았는데,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지 리얼타임으로 구현하지 못하고 사전 제작된 영상으로 이뤄진 컷신이 많은 건 좀 아쉬운 부분이다.(사전 제작된 영상이다 보니 실제 내 캐릭터의 의상과 영상에서의 의상이 다름)

마을 규모도 시골 수준으로 작고 요즘 오픈 월드 게임들에 비해 월드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약 15km2로 11km2인 PS4 스파이더맨보다 조금 더 크다. 참고로 스카이림은 37km2다.)
게임 내 대규모 전투는 이정도 수준이다.

 

스토리의 유일한 문제는 미완성 상태로 게임이 끝난다는데 있다.

메인 스토리 퀘스트 목적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고 아버지의 유품인 검을 되찾는 것인데, 게임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마주치지도 못한다.

그리고 검 또한 되찾지 못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개발사에서 여러 가지 여건상 스토리 전체를 담아내기 어려워 3부작으로 계획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전 정보 없이 플레이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려는 시점에 게임이 끝나버려서 좀 허무했다.

하지만 메인 퀘스트 분량만 해도 족히 3~40시간은 되기 때문에 짧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아쉬울 뿐..

다행히도 킹덤컴이 300만 장 이상 팔리며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다음 편 제작이 가능할 것 같고 후속작은 아쉬웠던 점들을 보완해 더 높은 완성도로 나와주길 기대한다.

어쩌면 위쳐의 CDPR처럼 유럽 변방의 게임 개발사로 시작해 3번의 시리즈를 거치며 세계적인 개발사로 성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 분이 아버지의 원수지만 게임 초반 이후 엔딩까지 다시 볼 수가 없다.
한창 재미있는데 게임이 끝나버린다.

 

킹덤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스카이림(스킬 시스템과 자유도) + 위쳐 3(퀘스트) + 마운트 앤 블레이드(전투)의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참고해 현실적으로 구현한 중세 오픈 월드에 잘 녹여낸 게임이다.

판타지가 아닌 리얼 중세에 대한 로망이 있거나 중세 유럽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