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way

운동회

집을 나와 2분이면 초등학교다.
집앞에 학교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쓰고 살고있었는데 어느날인가부터 아침마다 동요로 추정되는곡들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나면 확성기인지 마이크인지 모르는 어찌되었건 큰소리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다시 음악의 반복.
이게 오후까지 계속된다.
가을 운동회를 준비하는거였다.

내 생활패턴상 오전에 잠드는경우가 많은데 자려고 딱 누우면 이게 시작되는거다.
둔하기로는 누구못지않은 나조차 시끄럽고 정신이 사나워서 한참을 뒤척거린뒤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자다가도 고함소리에 깬일도 여러차례.
처음에는 뭐 며칠하다 말겠지 싶었던게 참 오래도 가더라.
한달정도는 매일같이 그랬던거 같다.
초등학교 운동회하는데 뭐 그리 준비할게 많은지..

그런데 이런 불편을 겪은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나보다.
학교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운동회 준비때문에 시끄럽다며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기사를 보게됐다.
많은사람들은 다 나중에 추억이되는게 운동회이고 일년에 한번뿐인건데 시끄럽다고 신고하는건 심하다는 의견이었다.
너는 초등학교때 운동회 안했냐는 사람들도 있었고.
물론 맞는말이다.
내가 어린시절만해도 학교 운동회는 단순한 학교 운동회가 아니었으니까.
그 학교 일대 동네잔치에 가까운것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달리기를 하거나 점심시간에 다 같이 운동장에 둘러앉아 김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연출됐었다.
사실 난 개인적으로 운동회가 싫었고 전혀 즐겁지도 않았지만, 뭐 이건 내 개인적인것이고 옛날 운동회가 가졌던 의미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20여년전에 비하면 학급당 학생수는 반으로 줄었고 그때와 지금과의 문화, 생활수준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졌다.
가족구성은 점점 소형화되고 공동체의식보다는 개개인의 사생활이 점점 중요시되고 있는 시대이다.
물론 나만의 시각일 수 도 있겠지만, 예전엔 상상할 수 도 없던 저런 신고가 발생한다는것 자체만으로 이미 그만큼 달라졌다는 증거가 되는셈이다.
정이 없어졌다느니 세상이 삭막해졌다느니.. 사실 이런말들이 나올법도 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고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옛날엔 안그랬는데 너무 각박해졌어..'라며 혀를 차봐야 달라지는건 없다는거다.

'아이들이 운동회를 통해서 단체와 협동에 대해 배우고 몸도 단련하고 즐겁게 뛰어놀 수 있다'
말은 좋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런말은 당사자의 어린시절이던 수십년전에나 통하던것이다.
아이들을 생각하는것 같지만 결국 자기자신의 과거경험에만 의존해서 그것이 정상이고 옳다는 착각에 빠져있는것이다.
이런 시각이 어른, 기성세대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과연 지금 어린이들이 운동회 예행연습을 재미있어 할까?
요즘애들이 틀에박힌듯 열맞춰 서서 구령에 맞춰 좌향좌 우향우, 앞으로 나란히를 하면서 무얼 배울까?
TV와 인터넷을 통해 각종 첨단정보와 유행을 꿰차고있는 10대들이 20년전에 하던 갑돌이와 갑순이를 즐거워할까?
운동과 건강? 체육시간은 괜히 있는게 아니다.
게다가 요즘은 운동 좋아하는애들은 스스로 스포츠나 운동을 즐기며 또 그런 시설도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해졌다.
옛날식 운동회가 가지는 의미가 이제는 없어졌다는것이다.
근 한달을 예행연습이랍시고 마이크들고 소리치는 선생님의 지시에따라 '훈련'하는것. 난 예전에도 즐겁지않았지만 요즘아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럴거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위한것이라면 당연히 아이들 생각이 우선이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것이 되어야 한다.
어른들을 위한 운동회가 아니다.
가을 운동회. 이젠 폐지해야될때가 됐다. 아니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초등학교앞에 살고 있고 한달가량을 잠을 설쳤지만 이걸 소음공해라고 생각하고 신고할 생각은 하지못했다.
이 글의 요지는 운동회가 소음공해인지 아닌지, 신고하는것이 옳은지 그른지가 아니라 운동회란 행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된다는것이다.
의미가 퇴색되었다면 바꾸거나 과감히 버려야되는것이고 또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되는것이다.
이미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당사자들도 즐기지 못하는것을 과거부터 해왔다는 이유만으로 지속하다보니 소음공해니 신고니 하는 일들이 생기게 되는것이다.
세상 삭막해졌다 옛날엔 안그랬다는 소리를 하고만 있으면 소용없다.

더이상 학교 운동회는 동네 잔치가 아니다.
운동장이 떠나가라 아침부터 틀어대는 음악부터 없애고 군사정권의 찌꺼기인 제식훈련식 열맞추기따위도 없애야된다.
굳이 전교생 모아놓고 마이크, 확성기로 온종일 외쳐대지 않고도 소규모 그룹형태로 얼마든지 짜임새있게 행사 꾸밀 수 있다.
꼭 모래주머니 던져서 박을 터뜨리고 마지막엔 계주를 뛰어야만 운동회가 되는건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코스대로 '훈련'받은 아이들이 거기에 맞춰 청군, 백군 경쟁하며 착착 진행되는것에 더이상 아이들은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걸 지켜보는 어른들만 흐뭇해할뿐이다.
너 달리기잘하니까 100m나가고 넌 응원하고.. 이런게 아닌 아이들이 직접 계획하고 자발적인 참여하에 이뤄지는 축제형식으로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마다 전교생 운동장에 모아놓고 열중쉬어 자세로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연설을 들어야 하는 아침조회도 사라져야 한다.
운동회보다 더더욱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사가 아침조회다.
아침조회때 교장선생님 설교 열심히 듣고 감명받는 사람 아무도 없다.
괜히 자세 삐뚤어졌다고 시범케이스로 걸려서 귀싸대기나 맞는게 아침조회시간이다.
열중쉬어 자세로 그거 10여분을 못참고 있냐고? 그걸 통해 인내심을 배운다고?
학교는 배우고 학습하는곳이지 열중쉬어 자세로 제식훈련 받는 군대가 아니다.
이런건 이미 똑같은 머리모양에 똑같은 옷 입혀놓은것으로도 충분하다.

획일적인 찍어내기식 교육에서 자율적이고 창의력을 중시하는 형태로 바뀌어야한다고 목소리 높이면서도 정작 획일적인교육의 대명사인 운동회와 아침조회 행사가 꿋꿋히 이어지고 있는것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버릴건 좀 버리고 바꿀건 좀 바꾸자.